Thursday, October 31, 2019

매일 더 둔해지는 것 같아서 일기라도 써야되나 싶다가도 그냥 폰으로 밥먹은거 몇장 찍고 마는 날이 대부분이다. 그러다보니 오늘에서야 펼쳐 본 메모장에는 몰상식한 앞집 이웃에게 최대한의 수치심을 안겨주기 위해서 몇날 며칠을 다듬고 또 다듬었던 편지 한 통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짜증나는 얘기니까 다음에). 가사나 일기 같은 것을 쓸데면, 고칠수록 이상해져서 처음 스케치에서 많이 안건드리는 편인데, 차마 복도에 붙이지 못한 이 편지 만큼은 수십번의 수정을 통해 완벽한 문장들로 완성해 놓았었다. 살면서 애인을 포함해 그 누구에게도 이만큼의 시간과 정성을 들여 편지를 써본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겠지만 몇년전 층간 소음에 시달렸을때 딱 한번 비슷한 정성을 들였던적이 있다. 

그때는 매일 새벽 6시부터 한시간 동안 쉬지 않고 내 침대머리 위에서 쿵쿵 울리는 발소리 때문에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신기하게도, '내일은 진짜 내가 윗집에 편지 넣고 온다' 같은 다짐을 하는 날이면 또 소음이 견딜만한 볼륨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시끄러워지면 나는 잠이 채 깨지도 않은 상태로 컴퓨터를 켜고 고칠게 없어 보이는 편지를 다듬고 또 다듬었었다. 그런데 그렇게 편지를 고치고 나면 아침잠도 깨고, 화가 놀라울 정도로 많이 가라 앉아서 모처럼 아침을 먹을수도 있었다. 

그렇게 결국 한달을 참다가 우체통에 편지를 넣었다. 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내 편지를 읽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떨려 그날 하루는 아무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우리나라 층간소음의 역사에서 단 한번이라도 편지가 효력을 발휘했던 적이 있을까? '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부끄럽네요' 같은 반응은 커녕 앞으로 발소리가 더 커질지도 모르는 판 이었는데도 걱정이 앞서기 보다는 반응이 너무 궁금했다. 바보도 아니고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아마 윗집사람이 내 편지를 읽고 감탄하길 바랬던것 같다. 부끄러워 할 것인가, 아니면 부들부들 할 것인가. 당연히 부들부들 하겠지.

그리고 다음날 내가 작업실에 가 있는 사이 윗집에서 내려왔었다고 한다. 내 상상속의 윗집은 집에 초대형 티비랑 소파, 그리고 근력운동 기구만 갖추고 사는 무식한 젊은 회사원이었는데, 실제로는 평범한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아내에게 들은 말로는 두분 다 연세가 많으셔서 더 늦기전에 해외여행을 한번 더 다녀오려고 준비 하시던중, '할망구' 몸이 갑자기 안좋아지는 바람에 매일 아침 침대위에서 열심히 운동을 하셨다는거다 (아마도 장안의 화제였던 발끝치기 운동이겠지. 실제로 불면증에 효과가 매우 좋다). 문제는 그집 안방의 침대가 돌침대여서 보통 침대와는 다르게 진동이 우리집 천장까지 그대로 다 전해졌던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거듭 사과를 하고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는 갑자기 너무 미안해져서 다음날 곧바로 빵을 한보따리 사서 윗집에 올라갔었다. 할아버지가 안계셔서 할머니가 문을 열어주셨는데 한눈에 봐도 안색이 좋지 않으셨다. 아마 동남아 여행이었겠지만 어쩌면 베네치아에서 할아버지랑 곤돌라 탈 생각에 들떠 있으셨을수도 있는데 갑자기 몸이 안따라주니 얼마가 속상하셨을까. 그것도 모르고 혼자 씩씩대며 정성스럽게 싸가지 없는 편지를 써올렸던 걸 떠올리니 할머니에게 죄송하기도 하고 허무해서 눈물이 날것 만 같았다.

다행히 작년에 엘레베이터에서 할머니를 마주쳤을때는 꽤 건강해 보이셨다. 주말에는 천장이 부서질듯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리는데 아마 손주일 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