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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따가울 정도로 방안에 연기가 자욱하지 않는 이상 프라이팬이 불타는 것도 못 알아챌 정도로 냄새에 둔감하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냄새가 있다. 따뜻한 빵에 스며든 고급 트러플 오일의 향, 내 흰자가 가득해지는 땀에 젖은 파운데이션 냄새, Bounce 섬유 유연제를 3장 정도 넣고 아주 바짝 돌려 말린 빨래 냄새,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이 냄새. 생오이에서 나는 비릿함 말고 올리브 영에서 팔 것만 같은 싸구려 오이 미스트라던가, 국민 장수 제품인 오이 비누에서 나는 인위적인 향은 항상 나를 행복하게 한다. 나는 오이향에 대한 내 집착의 기원을 알고 있다.
17살 내 첫사랑 상대는 (라고 35이나 먹고 쓰려니까 너무 아득해서 마치 없는 이야기로 거짓말이라도 지어내는 것 같지만) 오이 향이 나는 미스트 / 바디 스프레이를 쉬지 않고, 정말 쉬지 않고 뿌려대곤 했었다. 그 해 여름이 덥기도 더웠고, 이목구비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지성이었던 피부 위로는 화장이 떡칠 되어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내게도 가끔 미스트를 뿌려줬었는데, 그때마다 우리에게 같은 향이 난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았는지. 친구들이 알아채도 창피하다는 생각이 하나도 안 들었다. 그리고 여름이 갑작스럽게 끝났을 때, 나는 매일 벽에 얼마나 머리를 세게 박아야 죽을 수 있을까 같은 걸 고민하다 정말 초라한 모습으로 그녀가 애용하는 미스트를 한 병 사 왔던 적이 있다. 이게 내 기억의 전부다.
난 평소에 손을 자주 씻는 편이라서 세안 비누 외에 막 쓰는 비누를 따로 구입해야 한다. 예전에 마트에서 집사람에게 막 쓸 비누를 고르라고 해 놓고서는 막상 살구씨 비누를 골라오자 오이 비누가 좀 더 좋지 않겠냐고 계속해서 물어봤던 적이 있다. 미안해 할 필요도 없고, 전혀 미안 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왜 내가 오이 비누를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얘기를 해 줘야 될 것 같아서 구구절절 옛날 얘기를 해줬는데, 관심조차 안 보이길래 그냥 알아서 비누를 담아왔었다. 그냥 '오이 비누 사자' 라고 얘기 할 걸 그랬다. 하긴, 나도 집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라면 냄새에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해도 별생각이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