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October 23, 2021

시작은 그렇게 읽히겠지만 이건 그리움에 관한 글이다

작년 2월쯤 심한 기관지염을 앓았었다. 예전에 기관지를 다쳤던 적도 있고, 병원에서 대개 1주일이면 괜찮아지지만 너무 오래 앓거나 달이 넘으면 거의 평생 가는 만성 기관지염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를 듣고, 이주가 넘어가는 시점부터는 하루하루 걱정으로 피가 말라버릴 것만 같았다. 게다가 하필 코로나가 처음 발병한 시기랑 맞물려서 불안함은 극에 달아있었다. 매일 눈을 뜨는 순간부터 물속에 잠겨있는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잠에 들지 못하는 밤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작업실에 나가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면 불편함을 느꼈었다. 출근하는 날이 많아질수록 새로운 곡들이 늘어났고, 숨이 차서 입맛은 없었지만 배달 주문한 피자를 기다리는 마음은 여전히 설렌다는 사실에 기뻤다. 작업실에 있는 동안은 이상하리 만치 시간이 빨리 갔다. 그리고 여유가 조금 생겼던 어느 , 평소에는 건드리지도 않는 비디오 게임을 시작했다.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도 없는 Ico (2001)라는 고전 게임이었다.

게임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저주받은 존재라고 여겨지는 달린 소년이(Ico) 외딴섬에 있는 고성 안에 매장되는 걸로 시작된다. 안에서 Yorda라는 소녀를 만나게 되는데, 병약하다 못해 유령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그녀는 소년과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소년을 통해 직접 손을 잡고 이끌어 주거나 아니면 신호를 보내 그녀로부터 특정 행동을 유도해야 한다. 사람이 고성을 누비며 출구를 찾는 동안 계속해서 검은 그림자들이 나타나서 그녀 납치하려 하기 때문에 긴장감 놓을 없다.

앞서 말했듯이 고전 게임이다 보니 컨트롤도 미니멀 하고 그래픽 자체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많이 조악하다. 하지만 나는 그래서 좋았다. 디테일의 부재 대신 멀리 파노라마로 비춰주는 광활한 고성의 내부에는 곡선을 찾아볼 없이 넓고 높게 뻗은 건축물들이 쓸쓸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오래전 사람들이 붐볐던 기억만을 남긴채 버려진 공간이기 때문에 외로운 곳, 내가 도착하기 이미 한참 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서둘러 대피하듯 빠져나갔을 같은 기분이 드는 장소. 이런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 잘 모르겠다. 폐점 시간이 한참 지난 백화점 로비, 늦은 시간 막차가 끊긴지 모르고 들어간 지하철 역사 , 그리고 조금 다르지만 Edward Hopper 그림을 때도 나는 비슷한 기분을 느낀다 (실제로 Ico 게임 디자인은 Giorgio De Chirico 그림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나에겐 아주 어린 시절부터 반복적으로 꿈에 나오던 익숙한 풍경인데, 게임을 하면서도 그런 풍경과 기분을 수없이 마주했다.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어쩔 없이 Yorda 손을 놓고 떨어져 있어야 때가 있다. 하필 그럴 때마다 그녀를 납치하려는 그림자들이 스멀스멀 나타나기 때문에 엄청나게 신경이 쓰인다. 코너를 돌면 갑자기 괴물이 튀어나오는 Jump Scare랑은 다른 종류의 불안함이다. 설령 그림자들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가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견딜 있어야지만 퍼즐을 있고, 다시 출구에서 재회할 있다.   밖으로 아찔한 높이의 장애물들을 통과하며 죽음을 스치다 보면, 음산한 라임스톤 건축물 사이로 보이는 뿌연 햇살이 아름답게 보인다. 그리고 간혹가다 보이는 풀밭 역시 비록 투박한 초록색 픽셀이지만 내게는 마치 오랜 여행에서 돌아와 맞이한 침대만큼 반갑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호기심으로 시작한 게임이었다. 하지만 Ico Yorda 매일 조금씩 끝에 가까워지는 보면  마음에도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절망적이던 기관지염도 두 달이 넘어가면서부터 점차 차도가 있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게임 풍경이 훤하다. 분명히 눈으로 봤지만 번도 가본 적이 없는 , 그리고 가고 싶어도 없는 . 비밀스러운 역사를 가진 성안에서 작은 희망을 등불 삼던 사람. 그래서 영원히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장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이런 그리움을 뭐라고 부를까? 같은데 밖으로 나오지가 않는다.